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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der's column

A Woman from North Korea Whom I Met in Geneva

Registered Date May 07, 2015 Read 955

I met her for the first time in Geneva in the summer of 1988. After some 38 years of the Korean War in 1950, for the second time, ecumenical church leaders of Korean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of South Korea and the North Korean church leaders came together to discuss peace and reunification of Korea under the sponsorship of World Council of Churches. She came to the historic meeting as an interpreter for the North Korean delegates. She was young and attractive drawing much attention from the international delegates at the meeting. Her English was just good enough to interpret the prepared message of the North Korean head delegate, and she had a difficult time to translate all the verbal exchanges of the international delegates in Korean and in English. From time to time, she looked at me and asked me for help stating, “Professor, please help me on this.” So, I helped her to make our meeting go well.

 

After the official meeting, South Korean and North Korean church delegates had a farewell dinner gathering. When she stood up to make a farewell “speech,” she said that she learned a lot about the North-South church leaders’ ardent hope for peace and reunification of Korea. She expressed her desire to come to Seoul to study at Ewha Womans University and improve her English with me. Her eyes were shining and her voice was resounded with hope. We were told that she was not yet a Christian. That must have been the reason why she had a difficult time to follow some of our theological conversations in the meeting. We departed with no promise for the next meeting. However, we heard the news that after her return to Pyongyang, she was baptized in the one and only Protestant church, Bong Soo Church in North Korea, and became a choir member and deaconess.

 

We met again by surprise. Seven years after we met in Geneva, I attended a North-South Christian scholars’ meeting in New York City, and she showed up as a North Korean delegate. This time she attended the meeting not as an interpreter, but as an official North Korean delegate. We rejoiced our second encounter. At the welcome dinner, we sat at the dinner table side by side and exchanged our stories of life in Pyongyang and in Seoul. She talked about her life after our meeting in Geneva and how she is now a baptized church member in Bong Soo Church in Pyongyang, etc. Among other things, she asked me what kind of toys would be best for her boy child and where in the city she could buy the toy gift. Without hesitation, I told her that from my experience, “Lego” would be best. As we were talking about the toy gifts, I was debating myself if I should give her money to buy the set of “Lego” for her little son, but I was afraid of violating the South Korean National Security Law by giving money to a North Korean. So, I gave up the idea, and even until this moment, I regret the decision of my weakness in refraining from giving her money to buy a toy for her child. 

 

In 2004, I was admitted to enter Pyongyang for the first time after I left the city as a war refugee in the 1950 Korean War. I went in order to visit the building site of Pyongyang Science and Technology University as a delegate of the U.S. based United Board for Christian Higher Education in Asia. During the visit, on Sunday, when I attended Bong Soo Church I met her again for the third time. This time, we met not out of Korea, but in Korea and in a church. And this time, I brought her a bag of presents for her to use. As I recalled the “Lego” toys for her boy, she told me that her son is now in the North Korean Army after graduating from Kim Il Sung University. With a deep sigh, she said she is too old to come to study at Ewha Womans University. We sat together in the church pew, thinking if we could meet again in Seoul and worship together.

 

Last week, we heard the good news that the South Korean government granted permission to South Korean civil organizations to reopen the humanitarian assistance to North Korea. Since May 24, 2010, the South Korean government prohibited all the civilian humanitarian assistance to the North Korean people except few medical supports to the hospitals and child care. This time, fifteen tons of fertilizer will be sent to North by trucks through and across the Demilitarized Zone (DMZ) that divides North and South. A first lady of South Korea, Lee Hee Ho, wife of late President Kim Dae Jung has been invited to visit North Korean leaders sometime in May. We are hoping that these happenings will further the exchanges between North and South on all levels for peace, reconciliation and economic and cultural exchanges. On the other hand, we hear in the news that the U.S. has become military allies with her former enemy Japan to block and contain China by signing the guidelines for U.S.-Japan mutual defense.

 

We, as Koreans, remember the painful nightmares of the 1894 Sino-Japanese War and the 1904 Russo-Japanese War which made the wide road for Japan to come occupy the Korean peninsula and rule the Korean people until the end of the Pacific War in 1945. Should another war in Asia occur, it is very likely that Japan and U.S. military forces will fight China on the Korean peninsula as was the case of the Korean War in 1950. In such a case, both North Koreans and South Koreans will suffer, and the peninsula will be wiped out.

 

If this ever happens, we may never be able to meet the North Korean lady and her son, as well as her family and friends who welcomed me in Pyongyang’s Bongsoo Church with whom I prayed together for peace and reconciliation in tears.

 

Once again, we, the North and South Christians must come to meet in Geneva, in Beijing, in Japan, or even better in Pyongyang or in Seoul for peace and reunification. I will not give up my wish and hope of welcoming my friend in Pyongyang to come to cross the DMZ and visit us on the Ewha Womans University campus. Then, only then, I can openly call her by her real name. 

 

 

 

제네바에서 만난 북조선 여성

 

나는 그녀를 1988년 여름 스위스 제네바에서 처음 만났다. 6.25 한국전쟁을 겪은 지 실로 38년 만에 남한의 NCC 에큐메니컬 기독교 대표들과 북조선의 그리스도교도연맹 대표들이 두 번째로 모이는 자리였다. 그녀는 북조선 대표들의 영어 통역관으로 이 모임에 왔었다. 20대로 보이는 젊은 북조선 여성은 남한 대표들과 WCC 여러나라 교회 대표들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녀의 영어 실력은 북조선 교회 대표가 미리 준비한 우리 말 강연을 따라 영어로 옮기는 정도가 전부였다. 회의에서 오고 가는 대화를 영어와 우리말로 통역할 만한 실력은 부족했다. 가끔 통역하다 말고 나를 쳐다 보고, “교수님, 좀 도와 주세요.” 하면서 도움을 청하는 일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가까워졌다.

 

회의를 마치고 남북 교회 대표들이 회식을 하게 되었는데 북조선 대표들의 인사말 시간이 있었다. 그녀는 회의 중에 통역을 맡아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하면서, “저는 서울에 가서 영어 공부를 더 하고 싶어요. 서 선생님이 가르치는 이화여자대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싶습니다.” 그의 눈빛은 빛나고 있었고 그녀의 목소리는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헤어졌다. 우리가 제네바에서 만났을 때, 그녀는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 남북 교회 대표들이 하는 성경이야기나 신학적인 어려운 말들을 통역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우리는 가끔 그녀의 소식을 들었다. 제네바에서 평양으로 돌아 간 그녀는 북조선의 유일한 개신교회인 봉수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교회 성가대에서 봉사하고 있고, 집사가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95년엔가 뉴욕에서 다시 만났다. 미국의 한인기독학자회의에서 주최하는 남북 기독교 지성인들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회의에 북조선 대표로 그녀가 왔었다. 우리는 반갑게 만났다. 환영 만찬 석상에서 우리는 나란히 앉아 그동안의 소식을 나누면서 재회의 회포를 풀었다. 제네바에서 평양으로 돌아 간 이후, 기독교인이 된 이야기 등 할 이야기가 많았다. 그러면서 아들에게 장난감 선물을 해주고 싶은데 어디 가서 무엇을 사는 게 좋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많이 사다 주었을 테니 경험을 말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서슴없이 레고라는 장난감을 소개했다. 어느 백화점에 가도 쉽게 살 수 있다는 말 까지 했다. 나는 그녀가 자기 아이를 위해서 레고를 사가지고 평양으로 돌아갔는지 알 길이 없었다. 다만, 내 주머니에서 100불이라도 주면서 이 돈이면 레고 한 통은 살 수 있으니 받아서 쓰라고 하지 못한 것이 아직도 한스럽다. 사실 우리나라 법에 저촉되지 않나 싶어 망설이다 기회를 놓친 것이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2004년에는 내가 평양에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이번에는 봉수교회 일요일 예배에 참석할 수 있다고 해서 봉수교회 앞 뜰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다. 이번에는 준비한 선물 봇다리를 들려 줄 수 있었다. 그녀의 아들은 김일성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 군대에 갔다고 자랑하고 있었다. 반면 자신은 서울에 와서 공부할 기회를 영영 놓친 게 아닌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쉬었다. 우리는 한 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다시 헤어졌다.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분단 70, 우리는 평양이나 서울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어제 2010 5.24 조치로 중단된 민간단체의 대 북조선 인도적 지원이 재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경의선 육로로 비료 15톤 등 지원 물자를 싣고 황해도 사리원 지역에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 김대중 대통령의 영부인 이희호 여사도 내달 평양을 방문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면 꽉 막힌 남북 교류가 정부 차원과 민간 차원에서 다시 열릴 수 있을까 싶다. 미국이 일본을 무장시켜 앞장 세워서 북한과 중국을 견제한다고 한다. 동북 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 하는, 이른바 공동방위협력지침에 미국과 일본이 합의했다는 소식이 워싱톤에서 들려 온다. 우리는 1894년 청일전쟁과 1904년 러일전쟁의 악몽을 다시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다. 그 역사적 악몽이 21세기에 다시 현실이 되는 것이 아닌가 싶어 속수무책, 무섭고 답답하다. 그래서 남한의 우리뿐 만 아니라 북한 동포들의 평화와 안녕도 생각하게 된다. 이름 밝히기를 삼가야 하는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과 봉수교회 교인들, 나를 눈물로 환영해 주고 눈물로 평화와 통일을 기도하던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우리는 다시 만나야한다. 제네바에서 북경에서 일본에서 그리고 평양과 서울에서 남과 북의 그리스도인들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자주 많이 가져야 한다. 그러다 보면 휴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대체되고, 휴전선을 뜷고 개통하는 경의선을 타고 그녀의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다. 서울의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내가 그녀를 환영하게 되는 꿈이 이루어 질 수 있을 것이다.